나는 네 눈을 쳐다보기만 했다. 네가 입술밖으로 내뱉듯 전한 말을 듣고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지는 착각에 빠졌다. 네게 눈을 두지 않으면 그 어디에도 시선을 둘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너는 피하지 않았다. 얼마만큼이나 네 눈을 마주하고 있었을까. 나는 그 어떤 표정을 지을 자신이 없어, 그냥 웃고 말았다.
너는 나와 꽤나 길게 눈을 마주쳤다. 나는 네 눈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네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도, 아직도, 여전히. 네가 내 시야에서 사라져 나를 지나쳤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마치 놀이라도 한 것처럼, 나는 그 소리가 박히고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바람때문에 시린 두 눈을 깜박였다. 웃음, 웃음, 웃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푸르고 맑은 하늘. 저 하늘을 내가 얼마나 좋아했었지. 너와 함께 했던 시간들은 저 파란 하늘을 보지 않고서도 행복했다, 너는 이 하늘보다 더 파랬다, 나는 그 싱그러운 푸른색을 사랑했다.
푸르고 맑은 하늘. 푸른 그 색에 뛰어들고 싶어졌다.
9. x월 x일, 탕비실.
나는 늘 그랬던 것처럼 행동했다. 내 앞에 있던 너에게 농담을 건넸다. 너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그랬다. 나는 변하지 않았어, 나는 괜찮아, 나는 아직 버틸만 해.
그리고 한 순간 마주친 네 눈에, 나는 웃음을 잃었다. 조용해진 나를 쳐다보는 눈길이 느껴졌다. 나는 네 눈을 피했다. 장난처럼 어깨 위로 얹혀져 있던 손이, 피가 모두 빠져나간 것처럼 서늘해졌다. 나는 다시 웃음을 끌어올렸다. 저만큼 떨어졌던 미소를 되찾으려니 입꼬리에 경련이 일었다. 상사가 나를 부른 것처럼 말을 남기고, 나는 그 무리에서 빠져나왔다. 그래, 뛰쳐나왔다. 비상구 계단의 문을 열고 계단을 올라가려 하자마자 나는 넘어졌다. 손바닥이 까졌고, 발목과 정강이를 계단에 부딪혔다. 헛디뎠다. 멍청해서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올라가는 대신, 계단에 걸터앉았다. 어차피 그 누구도 따라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입술을 질끈 물었다. 아팠다. 아파서 울고 싶은데. 나는 네 눈이 생각나 울 수가 없었다. 건물 내에서 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위를 보는 대신 내 발끝을 쳐다보았다.
너는 언제부터 내 웃음을 싫어하던 걸까.
8. x월 x일, 집.
대청소를 했다. 안 입는 옷들을 모조리 정리해 상자 안에 넣었다. 그 과정에서 조금 울었다. 내 손에 네 옷이 잡혔다. 나는 그것을 상자에 박아넣으려다, 다른 상자에 그것을 집어넣었다. 그 곳엔 네가 찍혀있는 사진첩도 있고, 네가 첫 기념일에 줬지만 아까워 몇 번 쓰지 않았던 향수도 있고, 네가 내게 남긴 다른 것들이 있었다. 난 너를 잊는게 두려워 이렇게 정리해뒀는데.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나는 이 상자를 현관문 앞에 두었다. 조금 더 생각할 여지를 남겨두기로 했다. 그 때의 푸른 너는 아직 그 상자안에 남아있다. 그것까지는 버리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아.
너의 기억이 들어있는 상자에서 사진첩을 꺼냈다. 주방에서 가위도 가져왔다. 나는 내 기억속의 나를 잘라냈다. 밝게 웃는 너를 남겨두고, 나를 도려냈다.
어쩌면 네가 원한 것은 이런 것일지도 모르지. 나는 나의 멍청함에 웃었다. 하지만 가위를 든 손을 멈추지는 않았다.
7. x월 x일, 회사 앞 벤치.
오랜만에 회사 가까운 곳에 있는 편의점에서 술을 샀다. 가볍게 마실 생각이었기에 캔맥주였다. 빌딩에 들어와있던 불은 대부분 꺼져서 어두웠다. 야근때문에 어차피 늦게 끝난 날이었다. 손에 쥐었던 맥주를 들이켰다. 검은 하늘엔 반달이 떠있었다. 눈을 찡그려보자 점점히 박힌 별이 보였다. 웃음이 났다. 서울 하늘은 별 보기 힘들다더니 이렇게 잘보이네.
어느 새 손에 들렸던 맥주가 캔의 무게만큼 가벼워졌다. 미련없이 일어났다. 그리고 저 앞에, 낯익은 뒷모습이 보였다.
그 때 이후로는 15층으로 내려가는 법이 없었다. 당연하게도, 너, 혹은 다른 그 누구라도, 내게 먼저 연락하는 이는 없었다.
6. x월 x일, 옥상.
어머니, 아버지께 전화를 드렸다. 제가 많이 사랑하는 거 알죠? 내 말에 웃으셨다. 나는 덩달아 웃었다. 통화는 짧았다. 당연했다. 내가 전해드릴 말이 없었다. 사실 많았으나, 전부 전하기에는 너무 이른 감이 있었다. 그 때의 나는 편지를 쓰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담아야할 말들을 모두 담아주었다. 나는 통화를 끊고 주머니를 뒤적여 담배를 꺼냈다. 다 버린 줄 알았는데, 용케 서랍 구석에 박혀있었던 것을 찾아냈다. 이젠 끊지않아도 잔소리 하는 이가 없었다. 처음은 기침을 했지만, 한 두 번 연기를 받아들인 몸이 금새 그것에 적응했다. 오랜만에 목을 채운 연기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늘이 오늘따라 더 푸르렀다. 잡힐 것 같아 뻗어본 손가락 사이에는 당연하게도 걸린 것이 없다. 담배를 걸친 손가락 사이에서 올라온 뿌연 연기가 하늘을 어지럽혔다. 어지러워 몇 번 뒤로 휘청거린 후에는 담배를 발로 밟아버렸다. 금방 하늘은 다시 파랗게만 보였다. 그것을 보며 깨닫는다.
나는 저 담배연기구나.
5. x월 x일. 회사.
사표가 수리되었다. 이번 달이 지나면 이 자리에 나는 없었다. 부서는 조용했다. 나에게 왜 그만두냐고 묻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이 더 편했다. 누군가 말을 건다고 해도 내 결정이 바뀔 일은 없었다. 나는 조용히 남은 일수를 세었고, 여전히 15층으로 내려가는 법이 없었다.
없어. 없어. 없어.
4. x월 x일, 집 앞.
한 팔로 감아든 상자안에는 너의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하지만 이제 이 상자에서 나는 없었다.
번호를 바꿔버렸다. 집은 아직 그대로 였지만, 네가 날 찾아올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불이 전부 꺼진 네 집을 한 번 바라보고, 네 집 대문 앞에 조심스럽게 상자를 놓았다. 네 주소와 이름이 적혀있는 그 상자에 내 냄새가 배어있지 않기를 바랐다. 네가 물건을 보고 알아본다고 해도, 적어도 너는 보지도 않고 버리진 않을 것이다. 내가 아는 너는, 내가 알아온 너는 그랬다.
내일은 회사를 나가지 않아도 되었다. 15층에 내 얘기가 돌았던 안돌았던 상관없다. 넌 내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것이 조금 서운하기는 했다.
너는 나를 완전히 잊었니?
3. x월 x일, 우체국.
편지를 부쳤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향한 편지였다. 짐도 부쳤다. 쓰던 이불과 베개, 옷들, 사진들, 집에 있는 대부분의 것을 택배로 부쳤다. 창구에 있던 여직원이 들고 온 상자들을 보며 귀향하시는 거냐고 물었다. 그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2.
울었다. 눈이 안떠질 정도였다. 엊그제 들린 병원에서 상담을 받았다. 노이로제, 과도한 스트레스, 우울증, 불안장애라는 진찰을 받았다. 어떻게 상담을 받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냥 묻는 말에 대답하며 웃기만 했던 것 같다. 수면제를 처방받았다. 웃음이 나왔다.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1.
하늘이 파랬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셔츠도 아무런 얼룩없이 파랬다. 휴대폰은 해지했다. 그것조차도 택배로 부쳤다. 고요함이 가득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날 잡아준 네게 감사한다. 내가 보낸 편지를 잘 받아줬으면 좋겠어.